History Committee (독립운동사연구소)

박재순 교수님의 평 (장리욱 회고록, "도산을 따라서")

도산을 따라서
사제관계의 모범: 도산과 장리욱
장리욱은 『나의 회고록』에서 ‘도산을 따라서’란 글을 썼다.

1) 이 글에서 스승 도산과 제자 장리욱의 관
계뿐 아니라 도산의 삶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장리욱은 미국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는 도중에 두
차례나 학업을 중단하고 흥사단의 서무원으로 일하면서 도산을 가까이 모시고 도산에게 직접 배우면서
흥사단을 위해 헌신하였다. 장리욱은 한국의 흥사단이었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도
산과 함께 옥고를 치렀고 형무소에서 도산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며 특별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
다. 해방 후에 장리욱은 흥사단의 큰 기둥이 되어 흥사단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고 널리 펼치는데 앞장
섰다.
도산에게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장리욱처럼 일제의 억압과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고난과 시
련 속에서도 변절하지 않으면서 한결같은 성심을 가지고 도산의 정신과 가르침을 따라서 살았던 인물은
찾기 어렵다. 서울대 총장과 미국대사라는 고위직을 거치면서도 겸허하고 진실하게 흥사단의 정신을 지
키며 『도산의 인격과 생애』라는 귀한 책까지 썼다는 점에서 장리욱은 도산에게 더욱 귀중한 인물이
되었다. 장리욱과 도산의 관계는 사제관계의 모범을 보여준다. 마치 어부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 것처럼 도산의 부름에 따라 장리욱은 학업을 중단하고 도산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고 도산을 섬겼다.
1925년 듀북 대학교에서 교육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은 장리욱은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원
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그 때 컬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원은 교육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교육학
의 메카(聖地)처럼 여겨졌다. 특히 거기서 가르쳤던 “존 듀이 교수의 새 교육철학은 교육원리, 교육행정,
교육방법 등 모든 면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교육학을 전공한 장리욱도 컬럼비아 대학
교로 가서 공부하려고 하였다.
그 해 6월 상순에 장리욱은 듀북을 떠나 먼저 시카고로 갔다. 방학 기간에 시카고에서 일을 해서 학비
를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카고에서 갑자기 도산을 만나게 되었다. 도산은 1919년에 상해로 가
서 2년 동안은 상해 임시정부를 위해 일했고 1921년 임시정부를 나와서는 국민대표회를 소집하여 민족
의 단결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 3년 넘게 노력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5년 8개월 만인 1924년 12월 6일
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 때 도산은 미국에 1년 남짓 머물면서 미국교포들을 찾아 격려하고 생각
과 뜻을 모으며 힘을 결집하고 있었다.
1917년 이후 7년 만에 다시 도산을 만난 장리욱은 도산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도산은 그에
게 흥사단 서무원 일을 맡아달라고 당부하였다. 30의 나이였던 장리욱에게는 다시 학업을 중단하는 것
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이 서른이면 이미 공부하기에는 늦은 나이인데 여기서 한 해를 더 늦
추는 것은 단지 한 해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공부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잠시 숙고한 후에 장
리욱은 도산의 뜻을 따라 학업을 중단하고 흥사단 일을 맡기로 하였다. 대학에서 이론적인 학문을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산을 가까이 모시면서 도산의 높은 인격과 깊은 예지를 삶 속에서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리욱의 이러한 결정은 참으로 옳은 결정이었다. 미국의 대학교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삶의 진리와 지혜를 그가 도산에게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산이 1926년 2월
미국을 떠나 상해로 갔으니 이 때 장리욱과 도산은 8개월쯤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도산이 떠난 후에도
6개월을 더 머물며 흥사단 일을 보았지만 당시 흥사단의 형편이 어려워서 학비를 보조받지 못하고 도산
1) 장리욱, 『나의 회고록』 (서울: 샘터, 1975)

의 배려로 여행경비를 보조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장리욱은 도산의 삶과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붙잡을 수 있었다. 도산의 인격과 정신이 장리욱의 삶과 정신 속에 깊이 새겨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는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후에도 도산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서 흥사단의 중심에서 흥사단을 이끌 수 있
었다.
도산을 따라서 산 이들
베드로와 같은 남강 이승훈
도산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면 장리욱이 도산의 제자로서 특별한 위치에
있음을 알게 된다. 도산을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중요한 몇몇 사람을 살펴보자. 도산의 제자 가
운데 가장 나이 많은 이는 남강 이승훈이다. 그는 도산보다 14살 많았고 도산을 만나기 전에 이미 한국
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가 중의 하나였다. 남강은 10살 이전에 부모, 조부모를 모두 잃고 유기점 주인 방
사환으로서 심부름하며 살았다.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했던지 주인이 “저 애는 내가 일을 시킬 수 없는
애다. 일을 시키려고 하면 벌써 일을 했거나 일을 하고 있더라.”고 하였다. 학교 공부는 전혀 하지 못했
으나 스스로 공부하고 배우면서 자신을 닦아 일으켰고 정직과 신의로써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면서 기꺼이 남의 아래서 심부름할 훈련과 준비가 되었다는
점에서 남강은 도산의 제자와 동지로서 준비된 사람이었다.
청일전쟁이 나서 사업에 큰 손실을 입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보면서 시름에 잠겼던 남강은 1907년 평양
에서 도산의 강연을 들었다. 도산의 강연을 듣고 남강은 엄청난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당장 머
리를 깎고 술·담배를 끊고 도산을 만나 도산의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도산을 만나고 나서 집
으로 돌아온 남강은 한 동안 밖에 나가지 않고 방 안에 홀로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긴
남강은 방바닥에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고 갑자기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이런 남강을 보고 가족들과 친지들은 남강의 정신이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걱
정했다고 한다. 한번 크게 결단한 남강은 도산의 교육입국정신을 실천하는데 혼신을 다하였다. 가진 재
산을 다 바쳐 학교를 세우고 학교에서 마당 쓸고 변소청소를 하며 허드렛일을 맡아 하였다. 그는 삼일
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족의 큰 지도자로 우뚝 섰으나 죽을 때까지 누구보다 가장 충실히 도산의 교육정
신과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 하였다.
어떤 글에서 도산을 한국근현대의 예수로 비유하면서 남강은 도산에게 베드로 같은 인물이었다는 이야
기를 듣고 공감한 적이 있다. 물론 남강이 정신과 사상에서 도산의 제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남
강이 도산의 단순한 추종자만은 아니었다. 남강은 신민회와 청년학우회를 도산과 같이 했지만 흥사단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도덕적 인격적 주체를 강조하고 민주정신에 사무쳐 있었던 도산은 제자들을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지 않았다. ‘스스로 하고, 스스로 되게’ 하는 것이 도산의 교육정신과 원칙이었다. 남강도
스스로 하고 스스로 되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서 한국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우뚝 섰다.
씨사상을 형성한 유영모와 함석헌
유영모와 함석헌은 직접 도산을 만나 깊은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으나 남강과 오산학교를 통해서 간접으
로 도산의 철학과 정신을 이어서 발전시켰다. 도산 철학의 핵심은 인격(주체, 나)의 개조와 통일을 통해
민족(인류) 전체의 통일에 이르는 것이다. 주체의 깊이와 자유에서 전체의 하나 됨에 이르는 도산의 기
본 철학은 유영모와 함석헌에게서 더욱 깊이 탐구되고 발전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철학자도
도산 안창호, 다석 유영모, 씨 함석헌처럼 주체(나)를 강조하면서 전체의 통일을 강조한 사람은 없다.

주체의 깊이와 자유를 탐구하면서 전체의 하나 됨에 이르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세 사람은 일치한다. 유
영모는 깊고 높은 정신세계에서 성자의 삶을 살면서 동서고금의 철학과 사상을 회통하는 위대한 철학을
형성하였다. 함석헌은 도산의 민족교육운동을 계승하고 유영모의 깊고 큰 철학을 이어받아서 삶과 사상
을 통합하는, 바다처럼 크고 넓은 정신세계를 이룩하였다. 도산은 흥사단을 만들고 통일독립운동과 교육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민족적으로 펼쳤다는 점에서는 유영모나 함석헌을 능가했다. 유영모는 거의 은
둔자처럼 내적 철학적 탐구에 몰두했다. 함석헌은 대중연설과 글을 통해 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나 조직
화하지 못했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나 조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도산은 사상능력, 조직력,
사업의 기획과 추진력, 민주적 지도력에서 비교할 수 없는 역량을 발휘하였다.
도산을 지키며 따랐던 백범 김구
백범 김구는 도산보다 나이가 2살 많지만 도산을 존경하고 따랐다. 도산과 함께 신민회에 가담하여 황
해도에서 교육운동에 앞장섰던 김구는 도산을 깊이 존경하고 신뢰하였다. 상해에 있던 김구는 도산이
상해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도산을 보호해야 한다며 미리 준비하였다. 도산이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
장이 되었을 때 김구는 도산을 찾아와 정부 문지기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도산은 그를 경무국장으로
임명하였고 그는 경무국장으로서 임시정부 요인들 특히 도산을 경호하는데 집중하였다. 도산이 임시정
부에 있을 때 김구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도산에게 보고하고 의논하였으며 도산의 지휘를 받아서 일을
처리하였다. 한국사학자 박찬승 교수에 따르면 당시 상해의 계파들을 분류하면서 도산을 지지했던 서북
파의 첫 사람으로 김구를 꼽고 있다. 그는 흥사단 특별회원이 되었다. 그는 성정과 기질이 도산과는 매
우 달랐고 독립운동의 방법과 방침도 달랐지만 도산을 존경하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그의 생각이 도산
의 생각과 꼭 같지는 않았으나 한 번도 도산을 비난하거나 도산에게 등을 진 적이 없었다. 1932년에 도
산이 일본경찰에 체포된 후 공개적으로 도산을 비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에 격분한 김구는 청년들을
동원하여 도산을 비난했던 무리들(김석, 김철, 조소앙)을 응징했다.
상해에서 도산은 독립운동의 방법과 목적으로서 민족통일을 줄기차게 주장하여 ‘안창호의 통일독립’이라
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김구가 도산의 정신과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해방 후에 그가
민족통일을 위해 신명을 바친 것은 도산의 통일정신에서 자극과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해방 후 도산의 추모행사에 참여한 김구는 도산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절절하게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
이 말하였다. “선생의 위대한 정신과 영용한 전적(戰跡)을 체득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나이까. 오늘
이 자리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자 중에서는 선생의 발자취를 밟고 나갈 동지가 얼마나 되겠나이까. 바라
건대 3천만 각개의 뇌수(腦髓)마다 선생의 위대한 정신을 주입하여서 조국의 통일과 독립이 완성될 때
까지 영용한 투쟁을 계속하게 해주옵소서.”(안창호 평전. 청포도. 81~2쪽)
최남선과 이광수
도산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문필력과 사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은 최남선과 이광수다. 두 사람은 한국근
현대 문학을 창시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2인문학시대를 이끌었다. 누구보다 도산의 정신과 사상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던 두 사람은 단순한 문필가와 사상가가 아니라 국민계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이들이 일제의 압박과 회유를 이기지 못하고 변절한 것은 한국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도산과 흥사단을
위해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와 한밝문명론을 보거나 이광수가 쓴 민족개조
론을 보면 이들의 철학적 사상적 역량이 얼마나 대단하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변절했고 도산의
정신과 철학을 이어서 발전시킬 자격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것은 흥사단뿐 아니라 한국민족을 위해
큰 손실이었다. 깊고 높은 사상과 뛰어난 연설능력을 가졌던 도산이 문필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그가 문

필력을 갈고 닦았다면 위대한 문장가가 되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도산은 자주 문필력이 부족함을 말
했고 중요한 문건을 만들 때는 글을 잘 쓰는 이에게 맡겼다. 이런 점에서도 이광수와 최남선의 변절은
도산과 흥사단을 위해 아쉬운 일이다.
도산의 정신을 지킨 사람들
도산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많았으나 장리욱처럼 도산의 사상과 사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제자는 찾
아보기 어렵다. 도산의 제자 가운데 조병옥은 흥사단의 창립 발기인으로서 옥고를 치르면서도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정치인으로서 대통령후보까지 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는 유관순과 함께 아우내에서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서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유상규와
안태국과 최광옥을 도산이 특별히 아끼고 기대했으나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 동양적인 의미에서 스승
과 제자의 관계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은 장리욱이다. 그는 몸으로 도산을 따르면서 도산의 삶과 정신
을 배우고 익혔다. 그리고 그가 도산에게 배우고 익힌 것을 서울대 총장과 미국대사를 거치면서 민족을
위해 실천하였다. 그는 흥사단을 바로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도산의 인격과 생애’를 책으로 써서 도산의
정신과 사상을 세상에 전하였다. 도산에 대한 다른 전기들이 여러 권 나왔으나 진솔하면서 차분하게 자
신이 직접 만나고 배우고 경험한 도산의 삶과 정신을 오롯이 드러낸 것은 장리욱의 책이다.
장리욱은 도산을 따라 여행하고 도산과 함께 지내면서 무엇을 보고 배웠던가? 그의 글을 통해 살펴보
자.
높은 산봉우리서 도산과 함께 본 세상
장리욱은 도산을 따라서 무엇을 보았던가? 그는 도산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넓은 세상을 보았다. 도산
과 장리욱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절경의 산악지대를 굽이굽이 돌아서 4,500m가 넘는 파익스 고봉
까지 올랐다. 광활한 미국 대륙에서 높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 무한대로 펼쳐진 크고 넓은 벌판을 도
산과 함께 바라보는 장리욱의 정신은 얼마나 감격스럽고 벅차올랐을까! 장리욱은 높은 파익스 봉우리에
서 하늘에 닿는 높은 산맥의 장엄함을 느끼면서 그 산보다 더 높은 생명과 정신의 높은 꼭대기에 이른
도산의 장엄한 인격과 아름다운 품격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미국 대륙의 높은 산꼭대기에 도산과 함께
서서 장리욱은 하늘과 땅을 함께 보고 높은 하늘과 광활한 대지와 하나 됨을 느꼈을 것이다. 높은 산봉
우리가 홀로 높고 외롭지만 온 세상을 다 내려다보고 온 세상을 하나로 품고 거느릴 수 있듯이, 도산의
높고 외로운 영혼은 파익스 산꼭대기처럼 장엄하고 아름다우면서 온 세상을 내려다보며 하나로 품고 거
느릴 수 있었을 것이다.
도산과 함께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아름답고 장엄한 절경을 보면서 파익스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 장리욱
은 도산의 아름답고 장엄한 인격과 생애의 정상에도 함께 올라가서 자유롭고 활달한 도산의 정신과 인
격의 높은 산봉우리를 함께 느꼈을 것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 본 사람은 하늘의 높고 깊음과 땅의 크고
넓음을 함께 느낄 수 있고 작은 욕심과 다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장리욱은 틀림없이 도산의 인격과 생
애에서 하늘의 높음과 땅의 두터움을 배우고 느꼈을 것이고 금강석처럼 깨지지 않고 오염되거나 변질되
지 않는 생명의 진리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도산의 인격과 생애를 이어서 도산처럼
흔들림 없이 바르고 큰 길을 갈 수 있었다.
겸허하고 소탈한 도산의 모습, 다정한 벗이자 친근한 스승

도산은 상해에 있을 때 일이 너무 많았을 뿐 아니라 온갖 음해와 중상모략으로 힘든 시절을 보냈다. 지
나친 과로로 심신의 극심한 피로를 자주 느꼈고 몸져누울 때가 많았다. 도산은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는
성공했으나 지도자들의 단합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2년 만에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고 임시정부를 떠
나서 민족의 대동단결을 위해서 3년 동안 민족대표회의를 소집하였으나 분파주의와 소영웅주의, 이념의
갈등과 대립으로 그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5년 반 만에 다시 미국에 돌아와 가족과 흥사단 동지들과 함
께 지내며 도산은 병들고 지친 몸을 추스르고 생각과 힘을 키우고 있었다. 1년 남짓 미국에 머무는 동
안 도산은 독립운동과 전쟁을 위해 동포들의 생활향상과 인격수련을 위해 중국에 이상촌을 만들 구상과
계획을 가다듬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도산은 심신의 여유와 자유, 평화를 맘껏 누릴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짧은 기간이 도산이 무거운 과제와 일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유
일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이 때 도산은 천하를 유람하는 사람처럼 장리욱과 한가하고 평화로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여행길에서 장리욱은 도산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근엄하고 엄정한 도산이 여행길에서 보여주는 소
탈하고 천진한 모습은 도산의 정신과 인품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젊은 처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장리
욱과 함께 여행하면서 도산은 차를 세우고 몸소 캔디를 사오곤 했다. 장리욱이나 처제를 시키지 않고
캔디를 직접 사오는 도산의 행동이 참으로 도산다워 보인다. 조선의 양반 선비들은 남에게 심부름시키
는 것을 당연하고 마땅한 것으로 알았다. 양반 관리들은 남을 부려먹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산은
일하지 않고 남을 부려먹으며 살았던 양반관리들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보았다. 민주정신에 투철했던
도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나 스스로 하려 했고 기꺼이 남의 아래서 심부름을 하려고 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남강은 평생 남의 심부름꾼으로 살려고 작정하고 크게는 나라의 심부름꾼이 되었고
작게는 궂은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였다. 오산학교 교사로서 오산의 민주정신을 체득한 유영모는 평생
남에게 잔심부름을 시키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였다. 함석헌도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하였고 남에게 심부
름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늙은 나이에도 어디서나 그 누구나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하면 함석헌은 거절
하지 않고 달려갔다. 70대 중반에 아내가 파킨슨병으로 몸져누웠을 때는 그가 여러 해 동안 아내의 오
줌 똥을 손수 받아냈다.
캔디를 좋아하는 도산의 밝고 명랑하고 천진한 모습도 좋거니와 권위를 버리고 몸을 가볍게 하여 캔디
를 직접 사오는 가볍고 겸허한 도산의 행동도 친근해 보인다. 게다가 말없이 그냥 가지 않고 “장군이 또
캔디 생각이 날거야. 엘리스, 너도 그렇지?”하며 동의를 구하며 캔디를 사러가는 도산의 모습은 격의나
형식을 깨버린 친밀하고 소탈하며 다정하고 세심한 도산의 인품과 삶을 보여준다. 이처럼 작은 일상생
활에서도 도산은 다른 사람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산의 이런 작은 행동거지
에서 아주 겸허하고 소탈하면서 하늘처럼 크고 자유로운 도산의 품격과 향기를 맛볼 수 있다. 도산은
언제나 친구와 동지들을 인격적 주체로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 느끼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하며 더
불어 살려고 했다. 교감하고 소통하는 도산의 이런 자세와 태도는 자신을 자유롭고 편하게 했을 뿐 아
니라 더불어 있는 사람들을 편하고 자유롭게 했다. 그래서 도산에게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도산을 따르고 도산을 위해 헌신하였다. 도산이 상해에서 청년들과
여성들 그리고 교민들의 강력한 지지와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안으로는 한없이
근엄하고 엄정하면서도 밖으로는 권위와 격식을 버리고 겸허하고 소탈하고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한국근현대의 인물 가운데 도산처럼 이렇게 권위와 격식을 깨버리고 자유롭고 소탈하게 그리
고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며 말하고 행동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를 운영할 때
도산의 이러한 민주적 지도력은 큰 힘을 발휘하였다.
젊은 학생 이영학에 대한 도산의 정성

장리욱이 전해주는 도산과 이영학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도산을 이해하
고 도산의 삶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도산이 이름 없는 젊은 유학생 이영학을 배웅하
러 새벽에 역으로 홀로 나갔다는 작은 이야기에서 도산의 삶 전체가 드러난다. 1925년 여름 호놀롤루에
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서재필박사를 만나기 위해서 도산은 샌프란시스코로 갔고 서
박사와 함께 로스앤젤리스로 돌아왔다. 서박사는 이틀 동안 머물면서 도산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
었다. 서박사가 떠나기 전날 밤에 20대의 학생 이영학이 흥사단으로 도산을 찾아왔다. 이군은 평북 선천
의 유력한 인사의 아들로서 남강이 세운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는 5개월 전에 학비를 넉
넉히 가지고 미국에 왔으나 공부할 것을 단념하고 귀국하기로 결심하고 귀국인사를 하려고 도산을 찾아
온 것이다. 도산과 서박사는 이군에게 1년이라도 공부를 해보고 귀국여부를 결정하라고 권고하였다. 그
러나 이군은 충고는 고맙지만 자기대로의 소견이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귀국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아
침 아직 해도 뜨기 전에 이군은 떠나갔다. 그 새벽에 로스앤젤리스 중앙역까지 나가 이군을 전송한 사
람은 도산 한분뿐이었다. 이군의 귀국결심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의 강한 주체성을 도산은 높이 평가했
던 것이라고 장리욱은 말한다.
언제나 도산은 청년들에게 열심히 공부할 것을 강조하고 권하였다. 특히 그 시기에 학업을 통해 서양학
문과 지식을 배우는 것은 민족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나 도산 자신은 공부를 중단하고 교민
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일에 앞장섰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한 이영학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유학보다 더 중요한 일을 찾은 사
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도산은 이영학의 주체적인 결단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그의 고집스러운
결심 속에 미래의 큰 가능성을 보고 격려하고 기대하는 심정으로 이른 새벽에 홀로 이군을 배웅했을 것
이다. 도산처럼 자신의 학업을 중단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한 사람이 또 있다. 유영모도 오산
중학교 교사를 그만 두고 더 공부하기 위해서 일본 유학을 갔다. 그러나 일본 유학을 가서 대학입학자
격을 받아놓고 깊은 고민 끝에 부국강병과 입신양명을 추구하는 대학공부를 중단하였다. 진실하고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대학공부를 포기하고 돌아온 유영모는 농부가 되어 이마에 땀 흘리고 살면서 동서고
금을 회통하는 위대한 생활철학을 닦아냈다. 도산이 학업을 중단하고 기울어가는 나라와 민족을 일으켜
세우려고 혼신을 다하던 그 시기에 이승만은 미국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
만은 엘리트적 우월감과 권위주의를 버리지 못했다. 그는 결국 독재자의 낙인을 받고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엄정하면서 다정했던 도산
도산은 근엄하고 엄정하면서도 지극히 세심하고 다정다감하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평생 아내에
게 치마저고리 한감을 사주지 못한 부족한 남편이고 자녀들이 소학교 중학교를 졸업하는 동안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사주지 못한 부족한 아비라고 스스로 말하는 도산은 참으로 근엄하고 엄정한 공인으
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정다감하고 세심했던 그가 아내에게 옷을 사주고 자녀들에게 공책과 연필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교민들과 동지들의 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공인으로서 도산
은 자신과 가족에게 엄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녀관계에서도 도산은 여성에게 얼마나 엄정했던가! 임시정
부 각원으로서 도산은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하고 엄정했던가! 그러나 도산은 동지들과 제자들에게는 한
없이 정이 깊고 헌신적이었다.
도산은 사람에 대해서 평생 지극정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헌신하였다. 특히 가까운 동지나 제자들을 향
한 그의 사랑과 정성은 거의 초인적이었다. 도쿄에서 도산과 최남선은 함께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도산
과 함께 강연하는 자리에서 강연하다 병으로 쓰러진 최남선을 도산은 자기 가슴에 안고 여관으로 달려
가 지극정성을 다해 간호하였다. 이광수가 아팠을 때도 이갑이 아팠을 때도 안태국이 아팠을 때도 도산

은 자기가 아픈 것보다 더 정성을 다 해서 몸과 맘이 닳도록 간호하고 돌보았다.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
구 공원에서 일제의 고위관료들과 장성들을 죽인 날도 도산은 소년 단원이었던 이유필의 아들과 한 약
속을 지키기 위해서 찾아 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자기가 위험할 때도 도산은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존중하였고 그 소년에게 정성스럽고 성실하였다.
자신에게 엄정하고 남에게 다정하고 정성을 다 했던 도산을 따라서 자신에게 엄정하고 남에게 다정했던
이들이 있다. 이승훈은 속으로는 대나무처럼 곧으면서도 남에게는 다정하고 헌신적이었다. 언제나 나라
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면서도 손수 학교 마당을 쓸고 화장실을 청소하였다. 그는 궂은 일, 허드
렛일은 자신이 맡아 할 것이니 학생은 나라를 위해 큰 인물이 될 공부를 열심히 하고 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쓰라고 늘 격려하였다. 그가 삼일운동을 일으키고 감옥에 들어가서는 죽을 자리 찾았
다며 춤을 덩실덩실 추었고 감옥에 들어간 그 날부터 나올 때까지 3년이 넘게 변기통 청소를 맡아서 하
였다. 함석헌이 오산중학교에서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 민족의 큰 지도자였던 이승훈이 참여해서
젊은 함석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성경공부를 했다. 말년의 이승훈이 젊은 함석헌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이승훈은 함석헌의 영원한 스승이 되었다.
다석 유영모는 산골에서 학문연구와 정신수련에 몰두하였다. 정치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자주 찾
아왔으나 그는 언제나 무심하게 대했다. 그러나 제자인 함석헌이 북한에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
는 제자를 맞을 준비에 온갖 정성을 다 하였다. 해방 후 평안북도 교육부장을 지냈던 함석헌은 신의주
학생사건의 배후인물로 몰려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석방되었다가 1947년 4월에
월남하게 되었던 것이다. 함석헌이 내려오기 여러 날 전부터 유영모는 집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하였다.
이 때 따님 월상 씨가 굴뚝 청소를 하러 지붕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도산이 주위 환경
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했던 것처럼 유영모는 주위 환경뿐 아니라 몸과 맘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하였다.
도산이 제자에게 정성을 다 했던 것처럼 유영모도 제자에게 정성을 다 하였다.
도산, 남강, 다석의 삶과 사상을 이어 살았던 함석헌도 만나는 사람에게 지극 정성을 다 하였다.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나서 가족이 먹고 살기 어려울 때도 함석헌은 마산 결핵요양소를 자주 찾아 죽어가는
결핵 환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강연료와 원고료가 생기면 결핵요양소로 보냈다. 함석헌을 만났던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1976년에 척추 수술을 받기 위
해 서울대 병원에 50일쯤 입원해 있었다. 그 때 함 선생님은 자주 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셨다. 수술을
받는 날에는 부산 장기려 박사의 모임에 가셨다가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아침 8시 수술 시간에 맞추어
와서 수술실까지 따라 오시기도 했다. 수술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신 함 선생님은 마루에 앉아
시들어가는 마당의 나무를 보시며 “저 나무가 재순이 같다.”면서 우셨다고 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
나고 5공화국이 시작되면서 기독교 공동체인 한울회 사건으로 대전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80이 넘은 함
선생님은 대전의 법정까지 여러 차례 와서 말없이 격려하셨다. 도산이 젊은 학생 이영학을 배웅하러 홀
로 새벽에 중앙역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읽고 가난하고 병든 학생인 나를 함 선생님이 정성을 다 해서
찾아주신 것이 생각났다. 지극 정성으로 학생을 돌보고 섬기며 깨워 일으키는 도산의 교육정신과 실천
은 남강을 통해 유영모와 함석헌에게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도산에게 배운 생활철학
도산을 따라서 로스앤젤리스에 온 장리욱은 14개월 동안 “흥사단 일을 도우며 한편으로는 도산을 가까
이 모시면서 그의 생활철학을 배울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이었다.”고
하였다. 도산의 생활철학은 흥사단의 이념과 정신 속에 압축되어 있다. 장리욱이 도산의 생활철학에 대
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산의 삶과 행동, 정신과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흥사단의 3대
교육(덕·체·지교육), 4대정신(무실·역행·충의·용감), 사랑공부(정의돈수), 대공정신을 통해 헤아려 볼 수

있다.
도산의 생활철학은 학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인가? 장리욱은 도산의 생활철학이 학문적 깊이와 가
치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25년 6월 어느 날 밤에 학생회 주최로 시카고의 서북대학교
소강당에서 도산특별강연회가 ‘애국심’을 주제로 열렸다. 그 동안 도산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연설을 많
이 했지만 석, 박사과정의 대학원생들을 포함한 엘리트 지식인들만을 상대로 강연을 한 적은 거의 없었
다. 청중의 수준을 살핀 도산은 “애국심을 고무하고 감정에 호소하는 연설이 아니라 애국심 자체를 분석
하면서 그 심리적 기원과 성장, 그리고 이것이 국민생활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 등 여러
면에서 설명하는 강연방법을 택했다.” 강연을 들은 사람들에 따르면 “도산의 강연은 당시 많은 사회심리
학자들의 학식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술어와 표현이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다.”(장리
욱)
도산은 사회심리학을 전공한 학자가 아닌데 어떻게 당시 사회심리학자들의 학설과 거의 일치하는 강연
을 할 수 있었을까? 도산은 정규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서양의 이론적, 과학적 학문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면 그의 뛰어난 학식과 이론, 철학과 사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 도산은 자신의 삶과
경험, 생각과 실천을 통해 스스로 지혜와 이론을 체득하고 깨달았다. 그의 철학과 사상은 그의 삶과 정
신, 생각과 행동, 활동과 일에서 우러난 생활철학이었다. 인간의 생명과 정신은 감각과 이성보다 훨씬
깊고 큰 것이다. 감각은 대상의 부분과 표면을 지각할 뿐이고 이성은 대상을 분석하고 분해하여 부분과
표면을 이해할 뿐이다. 그러나 생명과 정신은 그 자체가 주체이고 전체이며 다른 생명과 정신의 주체와
전체에 대하여 교감하고 감응하며 서로 주체와 전체로서 관계하고 소통하고 서로 실현하고 완성한다.
따라서 생명이 깃든 인간의 몸은 머리의 이성보다 더 깊고 크게 본다. 그래서 생의 철학자 니체는 머리
의 이성보다 육체의 이성이 더 깊고 크다면서 ‘육체의 대(大) 이성’을 말했다. 머리의 이성을 가지고 이
론과 철학을 만들어내는 학자들의 정신세계는 아무리 해도 생명과 정신을 통해 진리와 지혜를 파악한
예수, 석가, 공자의 정신세계에 미칠 수 없다.
도산은 대학교에서 학문을 배우고 익히지 않았으나 그의 삶과 정신 속에서 그의 몸과 맘과 얼을 통해서
진리와 학식을 배우고 익혔다. 삶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고 주체적인 것이면서 전체가 하나로 이어지고
통하여 교감하고 감응하는 것이다. 정신은 하나로 통하고 일치하는 것이다. 도산은 자신의 삶과 정신 속
에서 주체적이면서 보편적인 진리와 지혜를 깨닫고 체득하였다. 도산은 자신의 몸을 통해 다른 인간의
욕망과 감각을 느끼고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맘을 통해 다른 인간의 감정과 심리를 헤아릴 수 있
었고 자신의 얼을 통해 다른 인간의 생각과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남에게서 듣고 배운 지식이나 책에
서 익히고 머리로 짜낸 이론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삶의 깊이와 전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런 지식과
이론은 치우치거나 지나친 것이기 쉽다. 그래서 한 때 유행하다가도 비판을 받고 낡은 지식과 이론으로
버려지고 만다. 그러나 자신의 몸과 맘과 얼을 통해 깨닫고 체득한 지식과 이론은 삶의 깊이와 전체에
서 나온 것이므로 치우치거나 지나치지 않고 삶의 깊이와 전체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런 지식과 이론
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줄 수 있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글을 읽고 그들의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면서 거듭 놀란 것은 그렇게 많은 지식과 주
장과 생각을 말하고 썼으면서도 오류와 편견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 특히 서양학자
들의 책을 보면 오류와 편견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은 흔히 특정한 관점에서 특정한 측면과 부분을
밝혀주지만 다른 관점에서 그리고 다른 부분에서 보면 그 오류와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안
창호, 유영모, 함석헌과 같은 이들은 책이나 머리를 통해서만 지식과 이론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
니라 자신의 몸, 맘, 얼을 통해서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고 체험했기 때문에 오류나 편견을 찾기 어렵다.
그들의 지식과 이론은 그들 자신의 몸과 맘과 얼로 검증되고 확인된 것이다. 도산은 대학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과 정신 속에서 몸과 맘과 얼을 통해서 깨닫고 체득했기 때문에 깊고 보편적인 진리
와 지혜를 터득할 수 있었다.

도산이 사회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애국심에 대한 그의 강의가 당대의 사회심리학과 거의 일치했
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나 아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산은 자신의 인격과 정신을 돌이켜보고 더듬
어보고 다듬고 세우면서 인간의 심리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도산은 나이 스물에 많은 청중을
상대로 연설을 하면서 자신의 맘과 청중의 맘이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고 일치하는 경험을 했고 이 과정
에서 사회심리의 역동적인 이치와 과정을 깊이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도산은 20대 초반
부터 4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고 훈련하고 그들의 힘과 뜻을 모아 민족독립운
동을 이끌었다. 공립협회, 흥사단, 신민회, 대성학교, 대한인국민회,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사람들을 교육
하고 훈련하고 대화와 설득을 통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교감하면서 도산은 이미 경험적이고 실천적으로
사회심리의 전문가와 대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누구보다 인간 개인의 심리를 깊이 이해하고 개
인과 집단과 사회의 역동적 작용과 영향 관계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많은 단체와 기관을
조직하고 운영하고 사람들을 교육·훈련한다고 해서 모두 사회심리학자가 된다고는 할 수 없다. 도산은
뛰어난 교육자요 대중강연자로서 언제나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능력
과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도산은 학자의 능력과 자질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에서 사회
심리학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교수들은 책을 통해 이론을 만들고 토론하지만 도산은 삶과 사회의 현장에
서 사회심리를 경험하고 형성하고 변화시켜 이끌어감으로써 사회심리학자들보다 더 사회심리의 이치와
역동적 변화과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도산은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체계적이며 일목요연하고 명
쾌하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으므로 ‘애국심’에 대하여 명쾌하고 일목요연하게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
을 것이다.
존 듀이와 도산
도산은 생활 철학자였다. 그의 생활철학은 그의 생에서, 몸, 맘, 얼에서 깨달은 진리와 지혜에 근거한 것
이며, 그의 진리와 지혜는 오류와 편견에서 자유로우면서도 보편적이며 심오하다. 삶에서 깨닫고 체득한
도산의 생활철학은 동양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중국의 경전 서경(書經)은 학(學)을 “가르침을
받아서 깨달음을 전하는 것”(受敎傳覺悟)이라고 했다.2) 가르침을 받아서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몸,
맘, 얼로 깨달은 것을 전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서양에서는 학문을 가리키는 말 science, Wissenschaft
는 ‘지식’을 뜻한다. 객관적 지식과 이론 자체를 추구했던 서구의 지식학은 공부하고 탐구하는 사람의 체
험적인 깨달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지식학은 수학이나 자연과학에서처럼 순수한 이성에 근거한 것이
다. 지식학으로서 서구의 학문은 삶과 정신의 주체적 깊이와 통일적 전체를 드러내기 어렵고 주어진 사실
의 지식과 정보, 논리와 개념을 추구한다.
당시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는 가장 영향력 있는 위대한 교육사상가요 철학자였으나 서양학
문의 이런 문제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서양문화와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서양의 연구교육체계가
세계의 교육을 주도하기 때문에 듀이의 교육사상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으면 사회의 중심에서 높은 지위
에 이를 수 있다. 미국의 유명한 컬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원에서 듀이의 교육학을 연구하고 학위를 받
은 것이 장리욱이 서울대 총장과 미국대사가 되는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서울대 총
장을 하고 미국대사가 되고 흥사단 운동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듀이보다 도산의 영향이 더 컸다고 생
각한다. 장리욱의 인격과 지도력을 형성하는데 보다 큰 도움을 준 것은 듀이가 아니라 도산이었다. 도산
에게서 생활철학을 배운 것이 “결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이라고 장리욱이 말한 것은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장리욱은 존 듀이에게서 교육학을 배웠지만 듀이에게서 배우지 못한 교육정신과 철
학을 도산에게서 배웠다. 그러므로 장리욱은 듀이에게서 교육학을 배운 다른 교육학자들과는 다른 품격
2) 張三植 編, 大漢韓辭典, 博文出版社, 1975, 374쪽 참조.

과 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도산의 인격과 생애’와 ‘나의 회고록’에서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문장과
소박한 생각을 통해 생명의 깊은 진리와 영혼의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냈다. 이러한 생명의 진리와 영혼
의 향기는 듀이의 교육학이 아니라 도산의 정신과 철학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듀이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이며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교육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원인과 결과를 중시
했으며, 교사와 학생의 소통을 강조하고 학생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역설하였다. 실용적 합
리적 민주적 개혁적인 사상은 도산에게도 있다. 도산도 원인과 결과를 중시했고 교육과정에서 학생의
주도적 참여를 강조했다. 듀이는 많은 책과 논문을 통해서 자신의 교육이론과 철학을 정교하고 체계적
으로 정리하고 확립하였다. 도산은 많은 저서나 논문을 내지 않았고 자신의 철학을 정교하게 체계적으
로 제시하지도 않았다. 도산은 소박하고 평이하게 흥사단의 강령과 이념으로 자신의 교육철학과 정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무신론자이고 경험론자인 듀이에게는 없는 결정적인 것이 도산에게는 있었다. 듀이
는 자연생명세계를 인간이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대상과 도구로 보았을 뿐 자연생명세계를 주체로 존중
하지 않았다. 도산은 자연생명세계를 인간 삶의 일부로서 존중하였다. 그는 자연생명세계와 주위 환경을
아름답게 닦고 가꿈으로써 인간의 인격과 정신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과 자연환경의 깊은
결속과 연대를 도산은 분명히 파악하고 실현하려 하였다. 그는 환경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하면 인간의
인격과 삶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된다고 믿고 그렇게 실천하며 살았다.
또한 무신론자로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졌던 듀이에게는 인간경험의 영적 차원이 결여되어
있었다. 무신론자였던 듀이의 철학에는 하늘의 영적 차원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 주체의 깊
은 영적 차원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주의자였고 경험론자였던 듀이는 몸, 맘, 얼을 통일하는 전인교육
의 철학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산은 몸, 맘, 얼/덕, 체, 지를 통합하는 전인교육의 철학과 방법을
제시하고 실현했다. 그는 인간의 인격과 주체인 ‘나’의 한없는 깊이와 자유, 무한한 능력과 책임을 강조
하고 민족과 인류 전체의 일치와 통일을 추구하였다. 도산의 교육철학과 정신을 바탕으로 교육이론과
교육과정, 교육행정을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탐구한다면 듀이의 교육철학보다 훨씬 심원하고 원대한 교
육철학과 방법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듀이의 교육철학에는 돈과 기계, 권력과 부에 기초한 산업국가
문명을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세계로 개혁하고 전진시킬 영적 힘과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산업을 존중하면서도 인격의 깊이와 자유에서 전체의 하나 됨에 이르는 길을 열어갔던 도산의
교육철학과 사상에는 돈과 기계에 기초한 산업국가문명을 넘어서 평화롭고 정의로운 생명과 정신의 생활
공동체를 실현할 힘과 전망이 있다.
도산에게 배운 생활철학의 내용
도산의 생활철학은 흥사단의 기본 가르침과 수련으로 제시되었다. 흥사단의 기본 가르침은 덕체지 삼육
과 무실역행충의용감 4대정신, 정의돈수(사랑공부)와 신성단결, 대공주의, 애기애타, 공사병행이다. 덕력
과 체력과 지력을 기르고 닦아서 건전인격을 세우고 정의돈수로 신성단결을 이루며 애기애타와 공사병
행으로 대공주의(민족 전체의 통일)를 실현하는 것이다. 흥사단 교육과 훈련은 덕체지를 기르고 닦는데
서 시작한다. 덕과 체와 지는 인간의 한 부분이나 요소가 아니라 저마다 인간의 주체이며 전체다. 덕과
체와 지의 관계는 더하기의 관계가 아니라 곱하기의 관계다.(이홍우) 덕은 체와 지를 반영하며 체는 덕
과 지를 반영하고 지는 덕과 체를 반영한다. 덕·체·지의 서로 다른 차원들이 중층적 복합적으로 결합되
어 있다. 덕체지의 통일 속에서 덕을 기르고 체를 기르고 지를 기르는 것은 인격과 정신의 차원을 한없
이 깊고 높고 크게 확장하고 열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덧셈이 아니라 곱셈이고 곱셈이 아니라 기하급수
적으로 차원변화를 해가는 것이다. 인격의 깊이와 높이와 크기는 이웃과의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서 공
동체적 조직의 신성단결을 이루고 작은 조직들의 신성한 단결은 민족과 세계의 평화로운 통일로 이어진
다.

도산이 창안하여 제시한 흥사단의 기본 이념과 실천은 기존의 서구철학과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의미와 가치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연과학에 기초한 서구철학은 감각과 이성에 기초한 학문이다. 감
각과 이성은 사물과 생명의 한 부분과 표면을 정밀하고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생명과 정신의 자유
롭고 깊은 주체와 통일적인 전체를 보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체와 전체를 실현하는
생활철학에 이르기 어렵다. 동양철학은 생의 체험과 깨달음에 기초하므로 생의 주체와 전체를 함께 이
해할 수 있다. 그러나 주체와 전체의 두루뭉술한 합일을 추구하는 동양철학은 개별적 주체의 구체적 현
실을 파악하기 어렵고 주체와 전체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일치와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고 제시하기 어
렵다. 근현대의 민주적이고 과학적이며 세계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생명진화와 인류역사의 역동적 변화
속에서 볼 때 도산과 흥사단의 철학과 사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근현대의 정신적 특징과 원리는
개인의 자유로운 자발적 주체를 최대한 강화하는 것이고 서로 다른 주체들의 차이와 대립을 포함하는
큰 하나의 전체를 무한히 확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화와 진보, 변화와 고양을 통해 주체와 전체의 역
동적 창조적 일치와 통일을 실현해가는 것이다. 감각과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생명과 정신의 주체와
전체와 진화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보다 깊고 큰 생각의 관점과 틀을 확립해야 한다. 주체, 전체, 진화(진
보)의 관점은 생명과 정신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감각과 이성에 의존하는 과학주의적 관점에서는 확립
할 수 없는 것이며, 주체와 전체를 합일 속에 뭉뚱그리는 동양사상에서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서양
근현대의 이성주의철학은 주어진 자연(본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자연주의철학과 맞물
려 있다. 하늘로부터 타고난 인간의 본성(本然之性)을 지키고 실현하려는 동양철학은 생명진화와 인류역
사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되고 스스로 자신을 형성해가는 생명과 인간의 창조적 역동적 본성을
이해하기 어렵다.
인격과 민족성의 개조와 민족전체의 통일을 추구한 도산의 생활철학은 땅의 물질에서 생명과 정신을 거
쳐 하늘의 얼과 신에로 나아가는 생명진화와 인류역사의 관점에서 그리고 하늘(얼, 덕)과 땅(몸, 체)과
인(맘, 지)의 합일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생명은 땅의 물질 안에서 물질을 초월한 것이며 인간의 정
신과 하늘의 얼과 신을 지향하는 것이다. 인간은 오랜 생명진화 끝에 땅의 물질세계를 두 발로 딛고 하
늘을 향해 곧게 일어선 존재다. 인간은 자신의 몸, 맘, 얼의 실현과 통일을 통해서 생명진화와 천지인합
일을 실현할 본분과 사명을 가진 존재다. 욕망과 감정과 지성과 영성의 실현, 생명진화(진보)와 천지인
합일을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과 사명이다. 인간은 파충류의 본능(식욕, 성욕)과 포유류의 감정을
정화하고 승화하여 육체적 본능과 심리적 감정을 지성과 영성에로 변화 고양시킬 사명을 가지고 있다.
파충류, 포유류와 인간의 얼굴을 비교해보라. 인간의 얼굴이 얼마나 품위 있고 아름답고 고귀한가! 인간
의 본능은 파충류의 본능과 같지 않고 인간의 감정은 포유류의 감정과 같지 않다. 인간은 본능과 감정
이 파충류의 본능과 포유류의 감정과 비슷하고 같은 점이 많지만 또 다른 점도 많다. 인간의 본능, 식욕
과 성욕에는 원초적인 생존의지와 욕구만 있는 게 아니라 위대한 지성과 거룩한 영성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식욕은 생존본능의 욕구를 넘어서 예수의 살과 피(정신과 뜻)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성만찬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성욕은 종족보존의 본능과 쾌락의 욕구를 넘어서 아름답고 거룩한 가족을 만들 수
있다. 인간의 욕망과 감정은 지성과 영성을 품고 정화되고 고양되어 하늘의 뜻을 이루는 나라를 땅 위
에 세울 수 있다. 땅의 물질 안에서 물질을 초월한 생명은 하늘의 기쁨과 사랑을 품은 것이고 서로 자
유로우면서 모두 하나가 되는 나라를 꿈꾸는 것이다. 도산의 삶과 정신 속에서 평생 생명의 기쁨과 사
랑이 마르지 않았다. 도산은 어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삶의 기쁨을 잃지 않고 사람다운 얼굴
을 지키며 인격을 새롭게 하여 깊고 높게 세우고, 두터운 사랑으로 서로 하나 되는 나라를 이루어갔다.

1 Comments
admin 2018.06.05 07:46  
거수!

장리욱 전 흥사단 이사장님이 쓰신 "회고록"에 나오는 "도산을 따라서"의 장을 동맹독서하였습니다. 장 박사님이 쓰신 분량에 약 2배 정도의 (깨알 같은 글씨체로) 11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으로, 박재순 교수님이 평을 해주셨습니다. 이번에 평을 쓰시고 옥고를 보내주시는 데 약 10일 정도 걸렸습니다. 아마 심혈을 기울여 쓰신 것 같습니다.

박 교수님이 쓰신 평은, 한국의 대표적인 철학자의 입장에서 본 객관적인 평가로써, 도산사상이라는 사상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적인 면에서도 남강 이승훈, 김구, 이광수, 최남선, 유영모, 함석헌에 이르는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갈수록 보물같은 내용들을 소개해 주시는 박재순 교수님께 무한한 감사를 올립니다.

저는 최근에 도산과 흥사단에 더 강하게 붙잡힌 바 되어, 제가 1978년도에 입단할 당시에 느꼈던 감격과 흥분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민족은 눈에 보이는 물질주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과 철학으로 결정됩니다. 도산과 도산사상은 우리 한민족이 반드시 붙들고 가야할 사상입니다. 장철우 전 위원장님은 도산이 한국의 국부라고 말씀하셨고, 이 사실을 한국민이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민족이 바로 설 수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참고로 박재순 교수님은 함석헌 선생님이 제일 사랑하셨던 수제자입니다. 박 교수님은 평생 씨알사상을 연구하였고, 더불어 한국의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였으며,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서, 한국이 낳은 씨알사상을 세계에 알려, 세계의 석학들을 놀라게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번 동맹독서에서, 도산사상이 남강 이승훈, 다석 유영모, 씨알 함석헌으로 이아지고, 도산이 한국 근현대의 모든 사상의 근본이 된다고, 폭탄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번에 보내 주신 평은, 제가 보기에는 아주 중요한 글입니다. 첨부 파일에 박 교수님의 평이 있습니다.

윤창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