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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욱 컬럼 - 미주한인] 대한의 땅을 마음대로 밟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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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는 1932년 6월 20일 상하이 흥커우 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의사의 저격사건 에 연루되어 상하이 프랑스조계, 이유필 거류민단장집에서 체포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집을 방문한 것은 그의 아들 민영에게 보이스카우트 운동기금을 주기로 약속한 날이었기때문이었다.

당시 도산을 모시고있던 구익균 단우는 2005년 8월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대화에서 그때 도산선생께서 집에 전화라도 있었으면 이미 감시속에 있는 그집을 가지안아 화를 면했을것 이라 했다. 전화놓기가 비싼시절이기는했어도 청빈하고 검소했던 도산의 샹하이생활을 몹시아쉬워 했다.

안창호는 상하이에서 일본경찰과 해군육전대에 체포되어 자갈색 중절모자에 검은외투를 입고 포승없이 희끗희끗한 백발을 휘날리며 인천항에 도착한다. 간만의 차이로 작은 배로 옮겨타고 고국의 땅을 밟는다. 조선총독부는 미와경부를 파견, 그를 압송하였다. 마중이어요 많은 동지와 친지들은 그와의 접견을 금지시켜 목인사로만 인사를 나눌수록 밖에 없었다. 언론사는 사진을 찍기 위하여 항만밖에 정박중인 배위까지 올라갔으나 찍은사진은 경찰에 압수를 당하고 보도통제를 받게 된다.

그는 1910년 4월 이또히로부미암살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불려가 구금에서 풀려 나왔지만 계속되는 미행과 감시로 조국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한지 23년만에 중국에서 강제송환을 당한다.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부인 이혜련과의 서신에서

“내가 이번에 곤란을 받았지만 그댓가로 그립던 대한의 땅을 마음대로 밟게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합니다. 모든 친족과 친구들이 다 대한에서 같이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했지만 모든생각이 허사였음을 고백한다. 도산은 상하이에서 항일투쟁로선을 결집하면서 국내에 흥사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연계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의 주어진 상황에서 수양동우회의 조직으로 시작하게 된다. 도산은 압송후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의 징역언도를 받을때 유능한 김병로,이인등의 변호를 마다하고 상고 재심을 거부한다.감옥에서의 무언의 투쟁이 국내외의 항일투쟁에 상징성은 물론 동지들의 신변 안전에 보다 더 도움이 되면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판단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양역전에 4000여명의 환영 인파

1935년 22개월의 형기를 남기고 가출옥한 안창호는 사흘후 26년만에 고향인 평양에 돌아온다. 평양역전에서 4천여 군중과 감격스러운 출영장면을 연출한다.

“26년만에 고향땅을 밟고 여러분을 대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이룩한 일없이, 보잘것 없는 이사람을 보아 주시려 이처럼 나와 주셨으니 황공할 뿐입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무슨 일에나 낙심하지 마시고 나아가서 후일의 성공과 행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일일이 여러분의 손목을 잡지못하여 유감입니다.

도산은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으로 1935년 2월에 불과 3년 남짓 풀려 나온후 또다시 1937년 6월 평양송태산장에서 수양동우회사건을 조작하여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하고 수백명이 동지를 붙잡아 갖은 고문과 자백을 강요하며 죽게하는 일본총독부의 역사적 만행을 목격한다.

도산선생 역시 꿈에도 그리던 나라의 독립도, 이국에 멀리있는 가족도, 함께하던 동지와 사랑하는 국민들을 가슴에 안고 옥사를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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