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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관련 기고문 [황 근 LA 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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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70년이 되는 해여서인지 관련 기사와 기고문이 많이 눈에 띠었습니다. 저도 중공군에 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과 간과하는 것을 써서 보내려다가 좀더 보완해서 쓰려고 미루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10년마다 한국전쟁 관련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었는데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LA에서 예정된 거의 모든 행사가 취소되었습니다. 올해가 아니더라도 내년, 내후년에라도 개최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음 10년 후에는 참전용사는 한 분도 생존해 계시기 힘들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두 편의 기고문을 올립니다. 

하나는 나바호 원주민 참전용사와 관련된 글이고 다른 하나는 가평고등학교와 미군 40사단의 인연에 관한 감동적인 글입니다.


미군의 참전과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은 지도에서 사라지고 공산치하에서 방마다 김일성 사진 걸어놓고 살고 있겠지요.

다시는 한반도에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며 전쟁을 각오하고 대비책을 세울 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유월의 마지막 날에 다시한번 되새깁니다.


[황 근 LA 흥사단]

 


<나바호 원주민과 6.25전쟁>


이남종(나바호 원주민 선교사)

[LA중앙일보] 2020/06/27 


올해는 한국전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다. 나바호 원주민을 비롯해 미국 내의 여러 원주민 1만여명이 미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나바호 원주민들은 한국전 참전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일례로 남한 땅의 거의 3분의 2에 맞먹을 만큼 넓고 황량한 광야로 이루어진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은 남북으로 관통하는 4개의 길이 있다. 그중 하나가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도로’로 명명돼 있다. 한국전에 참전한 나바호 용사들을 기리고 젊은이들과 방문객들에게 그들의 희생을 알리기 위해서다. 이 도로의 북쪽 끝 지점에 위치한, 꼭대기가 평평한 산 위에는 호피(Hopi)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거기에 전쟁기념관 건물이 서있다. 그 안에는 한국전 참전 호피족 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큰 동판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미국 원주민(인디언)의 한국전 참전을 대부분 모르거나 잊고 있지만 그들은 잊지 않으려 하고 있다.


나바호 지역은 현재 미국 내에서 인구 대비 코로나19 확진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마침 한국전 참전 70주년을 맞아 참전 국가들에게 마스크를 지원 중이었던 한국 정부가 이 같은 소식을 접하고 얼마 전 나바호족에게 마스크와 생필품들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몇몇 교회들도 많은 방역물품을 필자에게 보내주었다. 그 중에는 교인들이 마스크를 직접 만들어 보내준 교회도 있다.


미담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나바호와 호피 원주민 지역에 코로나19가 창궐하자 한 구호단체가 이들을 돕기 위해 인터넷 모금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홍보를 했는데, 뜻밖에도 아일랜드인이 적극 참여해 5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미국 원주민 중에는 촉토족(Choctaw)이 있다. 이들은 아일랜드계 주민들이 미국에 정착할 당시 주식이었던 감자에 전염병이 돌아 아일랜드인 100만명이 아사하고 100만명이 해외 이주길에 오를 때 도움을 주었다. 촉토족들은 아일랜드인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시 돈 170달러를 모금해 보내주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이번에 나바호와 호피 부족이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했다. 그들은 촉토족이 자신들이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과거 역사를 잊지 않았다. 오늘날 가치로 5000달러 정도 된다는 173년 전의 170달러는 약 1000배의 결실이 되어 돌아 왔다. 더 놀라운 사실은, 촉토족들 역시 코로나19의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그들보다 더 어려움에 처해 있는 나바호와 호피족을 아일랜드인들이 돕는 것을 환호하고 격려했다는 점이다.


많은 나바호 젊은이들은 70년 전 알지 못하는 나라의 사람들이 침략을 당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꺼이 참전해 이름도 없이 전쟁터에서 산화했다.


나바호 참전 용사는 800여명 정도인데 이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조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머지 원주민의 한국전 참전 용사들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역사 속에 파묻혀 있다. 최근 위스콘신주의 오지브와(Ojibwe) 원주민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 참전 용사였는데 작년에 작고하셨다고 한다. 나바호족은 한국 정부로부터 한국전 참전 메달도 받았고 이번에 마스크 등 지원도 받았는데, 다른 원주민 참전 용사들은 관심과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이 닿게 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전시 천막학교에 피어난 꽃>


강태광 / 목사·월드쉐어USA 대표 

[LA중앙일보] 2020/06/27 


오래전에 캐나다 참전용사 기념비를 찾은 적이 있다. 캐나다 지상군 사령관(육군참모 총장격)의 방한 기간 중에 자국 전몰 장병 기념비를 방문하고 헌화식을 갖는데 기도 담당 한국군 군종목사로 동행한 것이다. 그 기념비가 가평에 있었다. 그때 6.25 한국전에서 춘천, 가평 그리고 양평지역이 격전지였음을 알게 되었다.


격전지 가평에는 유엔군의 흔적이 많다. 미군, 영국군, 오스트레일리아군, 뉴질랜드군, 프랑스군 모두 가평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프랑스 랠프 몽클라르 장군 대대가 처음으로 전투를 시작한 곳이 가평 지역이었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끌었던 프랑스군 대대의 승전 기념비가 양평군 지평리에 있다.


전쟁이 한참이었던 1952년 미군 제40 보병사단은 가평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미 40사단 사단장 조셉 클리랜드 장군은 가평 시내를 돌아보는 중에 150명쯤 되는 아이들이 천막을 쳐놓고 공부를 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포성소리 요란한 전쟁 속에서도 천막 학교에 옹기종기 모여서 수업을 듣던 어린 학생들을 보고 사단장은 큰 감동을 받았다.


부대에 돌아온 클리랜드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말했다.“공부하는 아이들의 눈을 보니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우리가 얼마의 돈을 모아 학교를 지어주면 어떻겠습니까?” 1만5000여명의 40사단 간부들이 마음을 모으고, 일반 사병들은 2달러씩 기금을 걷어 약 2만 달러가량을 모았다. 학교 설계는 하버드대 건축학과를 나온 40사단 160연대 공병 장교가 맡았고, 학교 건축 공사는 40사단 공병대가 주도했다. 공병부대원과 장비의 활약과 관심있는 장병들의 봉사로 학교는 40일 만에 완성됐다.



학교를 짓고는 학교 이름을 고민하다가 사단장의 이름으로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사단장은 거절하며 말했다. “이 나라를 위해서 참전했는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처음 희생당한 우리 부대원 이름을 씁시다.” 40사단의 한국전 첫 전사자는 금성지구(화천-철원지역)전투에서 전사한 열아홉 살의 케네스 가이사 주니어 중사였다.


그래서 학교의 이름을 ‘가평 가이사(Kaiser)중학교’로 지었다. 이후 가이사 중학원은 가이사중 가이사고, 가평중학원으로 바뀌었고 1954년 가평공립고등학교로 정식 개교했다. 지금은 가평고등학교로 불리고 있다. 40사단은 이 학교에 깊은 애정을 쏟고 있다. 당시 40사단 소속 참전용사 5명이 1000달러를 장학금으로 내놓으며 지금까지 장학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이다. 이런 꽃이 어디 가평고등학교뿐이며 미 40사단뿐이랴. 터키군도 고아들을 돌보며 학교를 운영했다. 미군 해병은 포항에 교회와 고아원 그리고 병원도 세웠다. 미군 장병들은 수많은 전쟁 고아들을 미국으로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았다. 대한민국도 하나님 은혜와 선배들의 피와 땀으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다. 그들의 헌신과 수고에 감사하자. 그리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참전 용사들과 그 후손들을 돕는 일에도 적극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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