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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립협회, 이강 및 안중근 의사 (제6차 동맹독서)

우라 꼬레아!

제 6차 동맹독서 3번째 시간을 마지막으로 공립협회와 안중근 의사의 글을 마칠려고 합니다. 공립협회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간단히 마치는 아쉬움이 있지만, 공립협회를 학문적으로 다시 그 활동사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삔 의거를 통하여 위대한 인간으로, 영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안 의사와 같은 살신성인의 인생이 있구나 하고, 감탄하곤 했습니다. 안중근은 그야말로 감동입니다. 공부한 내용이 첨부파일에 있습니다. 
도산학회 회장님이신 이명화 박사님의 논문을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제 7차 동맹독서로, 최근에 출판된 박재순 저 "애기애타-도산의 삶과 사상"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모든 분들이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윤창희 거수
 
흥사단 미주 위원장(Hung Sa Dahn  a/k/a Young Korean Academy)
도산사상연구소 (Dosan Institute)
흥사단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History Committee)
583 Skippack Pike, Suite 300
Blue Bell, PA 19422
United State of America
(C) (917) 280-3255
愛己愛他 - 島山 安昌浩

3. 공립협회, 이강 및 안중근 의사 ( 제6차 동맹독서)

안중근 의사의 하얼삔 의거를 통해 크게 두가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첫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삔 의거 이전의 독립운동사이다. 하얼삔 의거는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톡 지회의 총 기획과 모든 준비를 통해 이루어졌다. 저격수도 2명을 뽑았다. 시베리아의 최재형 애국지사도 이 의거에 중요한 역확을 하였다. 미국에서 출발한 공립협회의 독립운동이 러시아의 시베리아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둘째는, 안중근 그 자체이다. 하얼삔 의거를 통하여, 안중근은 자연인으로 태어 났다가 자연인으로 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그의 고매한 인격, 굳건한 의지, 높은 학문의 경지, 동양 평화론을 주창한 사상과 철학, 감옥과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인간미 등을 통하여 접촉한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를 감독하는 일본인 간수 헌병은 안 의사를 사당에 모시고 평생 제사를 지냈고, 지금도 그 일본 군인의 후손들은 안 의사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 헌병이 안 의사한테서 받은 글이 “군인본분 위국헌신” 이다.

1) 공립협회와 이강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톡 지회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할 결정을 하고, 저격수로 안중근과 우덕순의 2개 조를 임명하였다. 이 결정에 총 지휘는 이강이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909년 10월 24일에, 거사 이틀 전에 안중근과 우덕순이 이강 앞으로 보내는 편지가, 유동하가 체포되어 재판부에 증거로 채택되어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유동하는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가 일본 관헌에 빼앗긴 것이다. 이 결정적인 증거가 된 편지는 거사의 중간 보고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편지는 10월 22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고, 블라디보스톡 대동공보사 이강 앞으로 수신인이 되어 있다. 편지에는 원동보를 통하여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특별열차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쓰여 있다. 안 의사가 이강에게 직접 보고한 말을 인용한다;

“ … 모 정거장에서 이것을 기다려서 그 일을 결행할 심산입니다. 그간 앞서 말한 것 양지하시고 일의 성사는 하늘에 있고 … 대한독립만세… 추이: 포브라니치나야로 부터 유동하와 함께 당지 도착 이후의 일은 본사에 통지하겠다.”

안중근은 이 보고서에서, 이강에게 거사의 준비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공립 협회의 창립 맴버로 미국에서, 신민회 시대의 한국을 거쳐, 러시아로 이동하여, 현지에서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강 등의 공립협회 회원들의 활동을 다시 조명해야 한다. 여기에는 전명운 의사, 정재관, 김성무 등의 하얼삔 의거에 참여한 모든 공립협회 회원들을 포함한다. 이강은 공립협회와 언론활동을 통하여 안중근 의사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었고,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결을 총 지휘 하였다.

2) 안중근 하얼삔 거사의 의의

1909년 10월 26일의 안중근의 하얼삔 의거는, 독립운동사에서 또 세계사적인 의미로 당시의 일본 최고 지도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여, 국제 질서를 변화하는 큰 의미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안중근이 하나의 영웅으로써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 의사는 재판 중에, 그리고 여순 감옥에서 위대한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다. 안 의사의 높은 인격, 동양 평화에 대한 신념, 그 사상과 철학은 가까이서 지켜보는 적국 일본 재판부, 검찰관, 수사관, 변호사와 여순감옥 교도관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에 여순 감옥에서는 안 의사의 글을 받기 위하여 많은 비단과 묵을 준비하여, 하루에 10시간씩 유묵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일본 재판부에 의해서 전체가 보관된 안 의사의 재판 기록은 영웅 안중근의 고매한 인격, 깊은 학문, 동양 평화에 대한 사상과 철학을 그대로 보여 준다. 오히려 적국인 일본의 사법부 기록이라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안 의사는 어머님의 청천벽력같은 명령으로 항소를 하지 않고 순국의 길을 택했다. 안 의사는 어머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효를 다 하였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순국하였으니 충을 다한 생을 살은 것이다. 동양의 최대 미덕인 “충효”를 다한 삶을 살았다. 그가 살아서 남기고 싶었던 “동양평화론”은 불가능 하였으나,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철학은 지금도 살아서 이 새대를 울리고 있다.

우라 꼬레아! 
2020년3월 12일, 미주 위원장 윤창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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