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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위하는 아키히토 일왕에게···“저는 위안부라 불렸던 길원옥입니다”

admin 0 1975
“제 나이 이제 92살입니다. 제가 죽기 전에 꼭 진실을 밝히고, 당신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기 원합니다.”
때로는 내용을 다 보지 않아도 전하려는 바를 알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꾹꾹 눌러쓴 글씨에서 느껴지는 진심과 발신인의 이름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20일 경향신문 앞으로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그러했습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1927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13살이 되던 해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전쟁터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로부터 80여년. 92살의 고령이 된 그녀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 최소한의 양심을 지켜주길 기다립니다.
편지를 받는 이는 19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12살이 되던 해 자신의 아버지가 주도한 전쟁으로 도시가 폐허로 변한 것을 목격합니다. 그는 자타공인 평화주의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로부터 역시 80여년. 86살이 된 그는 오는 4월 30일 자신의 평생 과업에서 퇴임합니다.
보낸 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받는 이 아키히토 일왕.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퇴위를 앞둔 일왕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아키히토 일왕의 퇴위 의식은 지난 12일부터 시작됐습니다. 1989년 즉위해 30년간 일왕의 자리를 지키다 생전에 퇴위하는 것인데요. 마지막 퇴위식이 열리는 4월 30일까지 일본에서는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게 됩니다. 일왕의 재위 기간에 맞춰 ‘연호’(현행 헤이세이)를 쓰는 일본에서는 한 시대가 끝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퇴위는 아키히토 일왕 스스로에게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평생 짊어져 온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왕은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시각을 두고 “금기를 건드리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일왕에 대한 사과 요구는 ‘망언’이라는 것입니다. 일본 내부에서만 나오는 반응도 아닙니다. “왜 전쟁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일왕에게 사죄를 요구하냐”거나 “일왕은 이미 사과 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도 있습니다. 이들은 1984년 히로히토 일왕의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발언과 1990년 아키히토 일왕의 “통석의 염”이라는 표현을 사과라고 주장합니다.
말꼬리 잡지 않겠습니다. 사실관계만 따져보죠. 위안부를 최초로 알린 것은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1984년 히로히토 일왕과 1990년 아키히토 일왕은 알려지지도 않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것이 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왕이 위안부 동원을 지시한 당사자거나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거나. 어느 쪽이든 ‘전쟁에 책임이 없다’는 일왕가의 주장과는 배치됩니다.
일왕에 대한 사죄 요구를 ‘외교적 결례’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실은 모르고 반일 민족주의만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언론의 책임인지도 모릅니다. 전쟁 책임에 대한 ‘사실관계’보다 안타까운 ‘사연’ 위주로만 보도하기 때문입니다.
‘공감’과 ‘책임’은 다릅니다. 현대 일본에게 ‘공감’이 아닌 전쟁 범죄의 ‘책임’을 묻는 우리는 사실관계를 추적해 책임자를 밝혀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길원옥 할머니의 ‘편지’는 가려진 전쟁 책임자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과거 세대의 범죄를 왜 내가 대신 사죄해야 하나요?”
교착상태에 빠진 위안부 문제의 근원에는 최종 책임자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은 패전이 확실해지자 전쟁범죄와 관련된 문서들을 대부분 소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누가, 왜, 어느 정도로’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두고 논란이 생겼습니다. 이는 ‘법적 책임’보다 ‘인도적 지원’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사라지고 전쟁을 ‘학습’한 세대만 남기 때문입니다.
이미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사례도 있습니다. 2014년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진행한 일본 NHK 방송 토론회에서 한 일본 학생은 “과거 세대가 저지른 행위를 왜 내가 대신 사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전후에 태어난 일본인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요?
누군가는 ‘일본 국민’이 아닌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 이전의 일본 정부와 전쟁 이후의 일본 정부는 권력이 기반한 ‘정당성’이 다릅니다. 전전 일본 정부는 ‘메이지 헌법’에 의해 일왕이 임명했지만, 전후 일본 정부는 ‘일본국 헌법’에 근거해 국회 지명으로 성립됩니다.
또 전전 일본 정부의 주요 책임자들은 비록 미흡했지만 ‘도쿄재판’으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전쟁과 단절’된 일본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범죄를 물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사실, 일본에는 딱 하나 바뀌지 않은 게 있습니다. 바로 ‘일왕’이라는 존재입니다. 메이지 헌법 제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일왕이 통치한다’입니다. 현행 일본 헌법 제1조 역시 ‘일왕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다’로 시작합니다. 두 헌법은 모두 일왕의 임명권을 명시해뒀습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전전과 전후 내각 성립 모두에서 최종 승인자였습니다.
결국, 일왕의 존재와 권한은 1945년을 기점으로 나뉜 두 시대의 일본 정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입니다. 만약 일왕에게 전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미 히로히토 일왕이 사망했다거나 일왕은 ‘사과’라는 정치행위를 할 수 없다는 주장은 부차적입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일왕이 이미 전쟁 책임에서 면제됐기 때문입니다. GHQ의 책임자 ‘더글라스 맥아더’와 ‘미국’에 의해서 말입니다.
■일왕은 평화주의자? 성단신화의 시작
히로히토 일왕은 ‘쇼와시대’라고 알려진 1926년 12월부터 1989년 1월까지 재위했습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시절부터 현대 일본을 모두 겪으며 ‘전쟁의 책임자’에서 ‘평화헌법의 수호자’로 극적인 변신을 합니다.
“일찍이 미국과 영국 두 나라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처음부터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이 이미 4년을 경과하면서~”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발표된 히로히토 일왕의 이른바 ‘옥음 방송’의 한 대목입니다. 이날 히로히토 일왕이 발표한 내용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항복 선언문’으로 알고 있는데요. 사실 이 문서는 ‘종전 조서’라고 불립니다. 약 800자 정도의 글에 단 한번도 ‘패전’이나 ‘항복’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해당 문건을 보면 일왕이 종전을 선언한 것은 미국과 영국 두 나라와의 전쟁입니다. 즉,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전쟁의 종전인 것입니다. 이때 한반도 문제는 관심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은 종전 이유입니다. “적이 새롭게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몇 차례나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여~(중략)~여전히 교전을 계속할 경우 끝내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류의 문명까지도 파괴하게 될 것이다”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일왕은 희생을 막기 위해 종전을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성스러운 결단’(성단)신화의 시작입니다.
■“일왕을 전쟁 책임에서 해방시켜라”
일왕의 전쟁 책임은 맥아더를 중심으로 한 GHQ에 의해 면책됐습니다. ‘종전 조서’는 일왕이 ‘평화주의자’임을 밝히는 증거로 면책의 주요 근거가 됐습니다. 이를 두고 군사편찬연구소 이상호 박사는 “일본 역사 왜곡의 기원은 미국의 일본 점령 이후 전쟁범죄자 처리에 대한 소극적 행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사실관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전이 임박해진 1945년 7월 유엔전범위원회는 전범 명단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당시 중국, 호주, 뉴질랜드, 소련, 네덜란드 등은 전범 재판에 히로히토 일왕도 회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당시 미 국무차관이던 조셉 그루는 일왕의 전범 기소에 반대하며 1945년 8월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일왕은 전범으로서의 증거가 부족하고, 그가 군사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는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를 전범으로 기소한다면 일본 국민 전체가 단합해 투쟁할 것이다”
이후 미국 정부의 입장은 일관됩니다. 1945년 9월 22일 미국 정부는 맥아더에게 전범재판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 사항을 전달합니다. 총 17개의 지시 사항 중 마지막 17조는 ‘일왕을 전쟁범죄자로 기소하는 어떠한 행동도 특별한 지시 없이는 행하지 말 것’이었습니다. 한 발 더 나가 미 국무부의 애치슨은 “히로히토를 이용할 생각이라면 일왕직에서도 사직하지 말게 하라”고 조언합니다.
1946년 1월 호주 정부는 히로히토 일왕을 포함해 주요 전범 62명을 선정해 미국에 통보합니다. 그러자 맥아더는 연합군 합동참모본부 의장에게 “히로히토에 대한 전범 조사를 했지만, 구체적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반발합니다. 이어 일왕의 재판 회부를 반대하는 실질적인 이유를 밝힙니다. “만일 히로히토를 기소해 항쟁이 발생할 경우 수십만 명의 지원병이 추가로 요구된다. 히로히토에 대한 사면이 준비되어야 한다”
결국, 미국은 1946년 2월 영국과 일왕을 기소하지 않는다고 합의합니다. 이 합의로 일왕의 전쟁 책임 논의는 끝이 났습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범죄혐의’가 없어서가 아닌 미국의 ‘점령 정책’을 위해 면책됐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당시 일왕도 미국의 뜻에 맞춰 ‘평화주의자’로 변신합니다. 그는 1946년 1월 1일 스스로 ‘신’임을 부정하고 ‘인간선언’을 합니다. 이를 발표하는 조서에는 평화, 인류애, 복지라는 단어가 강조됐습니다. 이에 여론도 반응합니다. 1948년 8월 15일 요미우리 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퇴위 반대’가 68.5%인 반면, ‘퇴위하고 일왕제 폐지’는 4%에 그쳤습니다. 결국, 일왕은 전범으로 기소되지도 퇴위하지도 않고 전후를 맞이했습니다.
■진심 어린 사과로 ‘떳떳한’ 용서를 받길 바랍니다
지난달 문희상 국회의장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아키히토 일왕을 ‘전쟁범죄 주범의 아들’이라며 “일왕의 한마디면 된다. 고령 위안부의 손을 잡고 진정 미안했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해결된다”고 말했습니다.
해당 발언이 전해지자 지난달 12일 아베 총리는 “발언을 읽고 정말 놀랐다. 극히 유감이라고 강하게 항의했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날 고노 다로 외무상 역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매우 무례한 발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한 달여가 지났지만 발언을 둘러싼 일본 정치권의 말 보태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 27일에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한국 국회의장 발언은 심히 부적절해 언급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일본 보수주의자들에게 ‘성단’은 단순한 신화가 아닙니다.
국내에서도 “평화주의자인 ‘아키히토 일왕’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실제로 아키히토 일왕은 1998년 “한때 한반도 사람들에게 지대한 고통을 주었다는 깊은 슬픔이 항상 내 기억 속에 있다”고 말했고, 2005년 사이판을 방문해 ‘한국인 전몰자 위령비’를 참배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아키히토 일왕 개인의 신념에 대해 논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일왕가는 ‘평화주의자’임을 근거로 전쟁 범죄에서 면책됐습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인간선언 당시 일왕제에 ‘평화주의적’ 전통이 있다고 밝히며 면책을 정당화했습니다. 만세일계(일본 왕실의 혈통이 단절된 적이 없다는 주장)라는 일왕가가 ‘평화주의자’ 노선을 따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길원옥 할머니의 편지가 일왕에게 전해질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전해지더라도 일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위안부 문제는 이미 국가 간 문제로 다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역사문제’, ‘정치문제’가 되면 상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했으면 사과해야 한다’는 상식보다 ‘외교적 수사’와 ‘정치적 상황’만이 강조됩니다.
그럼에도 기록은 남겨야 합니다. 피해자가 책임자를 지목하고 사과를 요구한 것을 역사로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키히토 일왕은 전쟁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입니다. 그에게 전쟁은 단순한 ‘역사’가 아닙니다. 일왕의 권위가 만세일계에 기반한다면, 아키히토 일왕은 선대의 잘못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일왕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 면책됐습니다. 현재 한일간의 갈등은 바로 이 문제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양국의 미래를 위해 책임자의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직 아키히토 일왕에게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한 달의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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