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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建國)의 심성(心誠)

admin 0 1909

“건국(建國)의 심성(心誠)”이라는 제목의 이 논설은 1919년 10월, 상해에서 신문 <獨立>의 사장 겸 주필이던 이광수가 쓴 것이다. 그가 친일파로 변절하기 전,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해에 와서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안창호에게 깊은 감화와 영향을 받아서 쓴 논설이다. 따라서 이 논설의 표현은 이광수의 것이지만 그 내용은 사실상 안창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논설에는 안창호의 기독교적 건국 사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건국(建國)의 심성(心誠)”에서, ‘심성’(心誠)은 ‘성심’(誠心)과 비슷한 뜻의 단어로, ‘성실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의미한다. 곧 “건국(建國)의 심성(心誠)”이란 ‘건국(建國)을 위한, 성실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라는 뜻이다.

건국(建國)의 심성(心誠)

부(夫)의 병(病)을 위(爲)하야 산천기도(山川祈禱)하러 가는 처(妻)의 심성(心誠). 목욕재계(沐浴齋戒) 분향(焚香)단좌(端坐)하여 일호(一毫) 사념(邪念)이 심리(心裏)에 입(入)하기를 두려워하는 심성(心誠). 화염중(火燄中)에 입(立)하야 주(主)에게 최후(最後)의 기도(祈禱)를 듸리난 순교자(殉敎者)의 심성(心誠). 이천만(二千萬) 동족(同族)에게 자유(自由)를 주며 천만대(千萬代) 후손(後孫)의 복락(福樂)과 번영(繁榮)을 위(爲)하야 신(新) 국가(國家)를 건(建)셜하랴는 국사(國士)의 심성(心誠). 오직 정결(淨潔), 오직 근신(謹愼), 오직 정의(正義), 오직 충성(忠誠), 오직 정직(正直). 음모(陰謀), 궤휼(詭譎), 시기(猜忌), 허영(虛榮), 쟁투(爭鬪)를 추호(秋毫)도 허(許)치 못하는 그러한 심성(心誠).

만세(萬歲)의 국기(國基)에 일점(一點)의 오예(汚穢)를 허(許)치 말지어다. 억만대(億萬代)의 자손(子孫)에게 일점(一點)의 불의(不義)를 유(遺)치 말지어다. 미국인(美國人)의 선조(先祖)가 그네의 자손(子孫)에게 전(傳)한 국가(國家)난 세계(世界) 현재(現在)의 제(諸) 국가(國家) 중에 가장 성결(聖潔)하니라. 그러나 대한민족(大韓民族)의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가 미국(美國)의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보다 더욱 성결(聖潔)하고 위대(偉大)한 정신(精神)의 발로(發露)임과 갓치 대한(大韓)의 국가(國家)로 미국(美國)보다 더욱 성결(聖潔)하고 위대(偉大)한 국가(國家)를 성(成)케 할지어다.

우리의 운동(運動)은 오직 일본(日本)에게 대(對)한 독립(獨立)뿐이 안이오 실(實)로 과거(過去)의 죄악(罪惡)된 사상(思想)과 생활(生活)에 대(對)한 근본적(根本的) 혁명(革命)이라야 하리니 일본(日本)과 여(如)히 악(惡)한 국가내(國家內)에서 우리 민족(民族)의 성결(聖潔) 위대(偉大)한 이상(理想)을 발휘(發揮)할 수 없다 함이 또한 우리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심각(深刻)한 이유(理由)의 일(一)일지니라. 그러므로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하여금 정의(正義)의 택(宅)이 되게 하고 자유(自由)와 평등(平等)의 소(巢)가 되게 하여 세계(世界) 인류(人類)에게 천(天)의 복락(福樂)을 시(示)하는 시온의 성지(聖地)가 되게 할지어다. 다시 전제(專制), 군벌(軍閥), 계급(階級), 빈천(貧賤), 음모(陰謀) 사기(詐欺) 시기(猜忌) 쟁투(爭鬪) 허위(虛僞)로 일보(一步)도 삼천리(三千里)의 성지(聖地)를 오(汚)함이 무(無)케 할지어다.

우리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위기(危機)가 하(何)에 재(在)하뇨? 혹(或)은 인재(人材)의 결핍(缺乏)에 재(在)하다 하리라, 금전(金錢)의 부족(不足)에 재(在)하다 하리라, 혹(或)은 일본(日本)의 강력(强力)에 재(在)하다 하며 또 혹(或)은 세계(世界)의 무정(無情)에 재(在)하다 하리라. 그러나 아등(我等)은 우리의 위기(危機)는 차(此)에도 아니오 피(彼)에도 아니오 오직 아등(我等)의 심성(心誠) 여하(如何)에 재(在)하다 하노라.

혹(或) 우리 국사(國士) 중(中)에는 일시(一時)의 기승(奇勝) 기공(奇功)을 전(傳)하기 위(爲)하야 동포(同胞)에게 대(對)해서나 혹(或)은 외인(外人)에게 대(對)하야 부정당(不正當)한 언위(言爲)를 짐짓 하려 하는 유혹(誘惑)도 볼지니 이것이 우리 독립운동(獨立運動)의 큰 위기(危機)요, 혹(或)은 일본(日本)의 완전(完全) 자치(自治)나 합병(合倂) 전(前)의 원상회복(原狀恢復)이라는 이(餌)로 우리로 엇던 부분(部分)을 유혹(誘惑)하리니 이는 더 큰 위기(危機)요, 혹(或)은 성공(成功)의 속(速)하지 못함을 비관(悲觀)하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하야 무질서(無秩序)한 과격(過激) 행동(行動)에 출(出)하리라는 유혹(誘惑)이 내(來)하리니 이는 더욱 큰 위기(危機)요, 또 혹(或)은 실망(失望)과 낙담(落膽)의 유혹(誘惑)이 임(臨)하리니 차(此)는 최대(最大)한 위기(危機)라. 야소(耶蘇)가 광야(曠野)의 삼(三) 유혹(誘惑)을 승(勝)한 것은 실(實)로 우리의 장래(將來)를 명시(明示)한 것이라. 기아(飢餓)에 임(臨)하엿으되 결(決)코 정도(正道)를 탈(脫)하야 석(石)으로 병(餠)을 작(作)하는 권모(權謀)를 행(行)치 아니하엿고 신(身)이 미천(微賤)에 재(在)하야 천하(天下)를 증제(拯濟)할 경륜(經綸)을 시(施)할 길이 없으되 결(決)코 마귀(魔鬼)에게 배(拜)하는 궤휼(詭譎)로써 천하(天下)의 정권(政權)을 집(執)하지 아니하엿고, 자기(自己)가 천(天)의 자(子)인지 아닌지, 즉(卽) 천(天)이 자기(自己)를 조(助)하는지 안은지를 시험(試驗)코져 하야 옥정(屋頂)에서 도하(跳下)하야도 상(傷)치 아니하는 요행(僥倖)을 구(求)하지 아니하엿나니 이러한 제(諸) 유혹(誘惑)을 승(勝)하야 정의(正義)와 심성(心誠)으로써 사(死)키까지 노력(努力)한지라. 맛참내 세계(世界) 인류(人類)를 증제(拯濟)하는 천국(天國)을 건(建)셜한 것이라. 우리의 이상(理想)이 입에 단순(單純)히 이족(異族)의 기반(羈絆)을 탈(脫)하는 것만이 아니오 탈(脫)하야 써 정의(正義)와 자유(自由)의 신(新) 국가(國家)를 건(建)셜함에 재(在)할지면 모든 유혹(誘惑)을 다 이긔고 철저(徹底)하게 우리의 이상(理想)을 달(達)키까지 분투(奮鬪)하여야 할지라. 우리에게도 내(內)에 대(對)해서나 외(外)에 대(對)해서나 오직 암실(暗室) 중(中)에서 오직 자기(自己)의 양심(良心)에 대(對)하여서나 오직 정(正)이오 오직 의(義)인 동시(同時)에 우리의 주의(主義) 주장(主張)을 관철(貫徹)하기까지는 고식(姑息)도 없고 타협(妥協)도 없고 자포자기(自暴自棄)도 없고 더구나 낙심(落心)도 상첨(喪瞻)도 없으리니 우리는 신성(神聖)한 국가(國家)와 자손(子孫)의 자유(自由) 복락(福樂)을 위(爲)하야 순교자(殉敎者)의 심성(心誠)과 태도(態度)와 용기(勇氣)와 인내(忍耐)로 분투(奮鬪)할 뿐이니라.

아아 대한(大韓)의 국사(國士)여, 오직 성결(聖潔)하고 위대(偉大)한 국가(國家)를 건(建)셜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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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8월 21일 상해에서 창간된 「독립신문」의 창간 당시 제호는 「獨立」이었다. 이후 「독립신문」의 제호는 여러 번의 정간과 속간을 거치며 「獨立」에서 「獨立新聞」, 그리고 「독립신문」․「독립」의 순으로 변화하는데, 마지막까지 ‘독립’이라는 제호를 버리지 않는 것은 독립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하게 표현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이한울, 6쪽).

“이상에서 살펴보았지만, 「독립신문」은 창간에서부터 종간에 이르기까지 안창호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즉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주도한 것은 안창호와 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안창호와 동향이거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또는 안창호와 동일한 주장과 목적을 가지고 있거나 1920년 이후에는 안창호가 조직한 단체 ‘흥사단’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이들을 통칭 ‘안창호그룹’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즉 「독립신문」은 ‘안창호그룹’이 주도한 신문이었다.”(이한울, 27쪽).

“첫 번째 시기는 창간(1919년 8월 21일) 이후부터 이동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식으로 취임하여 통합정부가 출범하는 시기(1919년 11월 3일)까지이다. 이 시기는 안창호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로 있던 시기로, 다시 말하면 사실상 이 시기의 임시정부는 ‘안창호 정부’였다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이 시기 「독립신문」은 임시정부를 대변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선전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하였다.”(이한울, 27쪽).

“「독립신문」에 실린 춘원의 자료를 살피는 데 1920년 6월 10일 「독립신문」 3면 광고 기사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 광고에는 ‘이광수 저 『독립신문논설집』’의 목록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독립신문논설집』은 독립신문총서 제2권으로 기획되었으며, “昨年 八月 以來로 獨立新聞에 揭載하엿던 論說 中에셔 三十五篇을 빼여 이 小冊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 먼저 그 목차부터 살피기로 한다.

第一篇 建國의 心誠
(一) 建國의 心誠 (二) 三氣論(三) 自由의 價 (四) 統一 (五) 國民皆兵 (六) 愛國者여 (七) 君子와 小人 (八) 信賴하라 容恕하라 (九) 新生 (十) 世界的 使命을 受한 吾族의 前途는 光明이니라 (하략: 인용자)”(김주현, 581쪽).

참고문헌
김주현, “상해 『독립신문』에 실린 이광수의 논설 발굴과 그 의미”, 〈국어국문학〉 176, 2016.
이광수, “건국(建國)의 심성(心誠)”, <독립(獨立)> 제17호 1면, 1919년 10월 4일자.
이한울, 「상해판 『독립신문』의 발간 주체와 성격」,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8.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354?fbclid=IwAR0ZqZijsyslaU9gGUSk3uah_QYpaXrQ3ypbvCaSZDYxZuLaNv1ZdUQy-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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