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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 - 함석헌의 증언

거수!

한민족의 최대 민족운동인 삼일운동이 100주년으로 다가 왔습니다. 삼일운동을 맞으면서 도산은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여, 41세의 나이에 민족의 지도자 반열에 오르고, 실제로 도산의 손에 의하여 통합임시정부는 완전히 기초를 다지게 됩니다. 도산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즉, 나라의 기틀을 잡은 것입니다. 그 어려운 통합부터 기초 작업까지, 도산이 없었으면 과연 그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자문해 봅니다. 

도산의 평생 동지, 남강 이승훈은 삼일운동을 시작하신 분입니다. 아래의 글은 어느 카톡방에 오른 글입니다. 도산의 평생 동지 남강 이승훈 선생님의 이야기를 함석헌 선생님이 남긴 글입니다. 내용이 좋아서 퍼왔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도산을 평생 사모하였고, 민족의 앞길이 캄캄할 때는 망우리 도산 묘지를 찾아서 생각에 잠기곤 했다고 합니다. 

윤창희 올림


흥사단 미주 위원장(Hung Sa Dahn  a/k/a Young Korean Academy)
도산사상연구소 (Dosan Institute)
흥사단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History Committee)
583 Skippack Pike, Suite 300
Blue Bell, PA 19422
United State of America
(C) (917) 280-3255
愛己愛他 - 島山 安昌浩

함석헌 선생이 1987년 3월 1일에 봉원교회에서 행한 삼일절 기념 강연의 일부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남강 이승훈 선생님과 같은 어른을 정말 보고 싶고 뵙고 싶습니다. 그러나 만약 보이지 않는다면 탄식하거나 냉소하지만 말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모두 분발하여 "나 하나만이라도 남강 선생님과 같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자!"라는 결심을 하고 일평생 매진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입니다.

“최린 씨는 천도교에 속했으니까 손병희한테 가서 승락을 얻었어요. 그러고는 우리나라에 누구누구 이름 있다는 분들을 민족 대표로 내세워 일대 거사를 하자고 의견을 모아서 윤치호 씨 같은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얘기를 하니까, 하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성립이 안 됐어요. 그때 최남선이 이건 이렇게 해 가지고는 안 된다, 평안도 가서 남강 이승훈 선생을 모셔오지 않고는―최남선은 그전에 남강 선생을 알았으니까―일이 성사가 안 된다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말했듯이 선생님께는 그전에 벌써 보고가 왔어요. 임시 정부에서 보냈던 사람은 정주 사람 정우혁이라는 분이에요. 크리스마스 무렵 저녁 때가 어슬어슬 됐는데 선우혁 씨가 선생님 댁에 와서 “아저씨 계십니까?” 하니까, 본 지 여러 해 지났는데도 벌써 말소리로 알아듣고, “거 아무개 아니냐?” “예, 그렇습니다.” “어서 들어오너라. 어떻게 왔냐?” “예, 들어가면 차차 말씀을 하지요” “아, 거기서 예까지 왔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냐? 어서 말해라.” 그래 들어가서 그 얘기를 했어요. 그때 유명한 말이, 듣고 나더니 선생님 뭐라는고 하니 “이승훈이 이제 죽을 자리 찾았다!”

“나는 다른 사람 모양으로 아랫목에 흥흥 앓다가 우는 자손에 치어서 갈 줄 알았더니, 이제 내 죽을 자리 찾았다.” 그러면 그이가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아요?”

“3․1 운동을 기념하면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할거냐? 그것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하는 운동인데, “나도 사람이오” 하는 마음 없이 일어날 수가 없는데, 그 생각을 누가 일으키게 했나? 그건 다른 사람도 있지만 남강 이승훈 선생 아니고는 할 수가 없다, 왜? 그이는 잘하면 그 공로를 내가 가지겠다든지, 내가 잘 났느니, 그게 아무것도 없는 이에요. 말로 칭찬하기 위해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야심이 없어요.”

“그랬기 때문에 재판정에 서서 물을 때에도 다른 사람과 대답이 달랐습니다. 왜 이 운동을 했나 하니까, “난 하느님이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종교 냄새가 난다 그럴지 모르지만, 그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그게 사실입니다. 말로만 그런 것 아닙니다. (중략: 인용자) 또 그것만이 아니라 민족 대표 서른 세 분 도장 찍는 날, 마지막으로 일이 결정되는 저녁에 한 말이 놀라운 말 아니에요?

선생님이 어디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왔는데 아직도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어. 뭘 이러고 있나 그러니까, “아, 지금 선생님 이름을 먼저 쓰나, 천도교의 손병희 이름을 먼저 쓰나, 우리는 선생님 이름을 먼저 쓰자 그러지만, 저 사람들은 손병희 이름을 먼저 쓰자고 그래 그럽니다.” 그러니까 “야, 순서가 무슨 순서야? 죽는 순서란 말야.(웃음) 어서 손병희를 먼저 써!” 그래서 문제없이 쫙 됐다는 거 아니오. 그래 가서 보시오. 선생님 이름은 중가운데 박혀 있지, 첫머리에 안 있습니다. 그런 걸 생각을 안하는 분이니까.”

“우리 나라 역사 있은 이래 처음으로 “우리도 사람이오” 그러는 운동인데, 그저 남의 종살이라도 하다가 돈이라도 모아서 벼슬이나 한다든지, 지방에 가서 돈 긁어모아서 청기와집 짓고 잘살다 간다든지 그밖에 생각을 못하던 그런 시대에 “이젠 우리도 사람 노릇 해야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3․1 운동에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일했는데, 이때까지 자기네를 사람으로 대접해 준 이가 없는데, 이분이야말로 자기네를 사람으로 대접했어. 나도 그때 들었어. “여러분이 다 나라의 주인이니까 누굴 믿지 말고 다 일어서서 만세를 불러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독립이 됩니다.” 그런 말 사천 년 역사에 처음으로 들어 본 소리거든요. 단군이 계실 땐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국가라고 이름을 걸고 한 이후에 언제 그런 말을, 더구나 평안도 놈들이 들어봐요? 그렇게 사람으로 대접받으니까 사람 노릇을 했지.”

출처: 함석헌, <씨알의 소리> 1989년 3월 제99호
-(1987년 3월 1일 봉원교회에서 행한 3․1절 기념 강연)

http://ssialsori.net/bbs/board.php?bo_table=0205&wr_id=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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