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SAN INSTITUTE (도산사상연구소)

안 도산의 대공주의 - 림관헌(시카고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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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수

제가 어제저녁, 윤위원장님께서 본인이 개설한 <미주흥사단 단우의 방>에서 탈방하겠다고 해서 단우간의 과열되고 공격적인 토론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아직은 카톡방의 건전수준이 보통은 되니 참기 힘들더라도 스스로 자정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뜻으로 요즈음 다시 불거진 <안 도산의 대공주의>를  좌우이념을 초월하는 동양의 전통적인 왕도인 공자의 대동, 손문 <중산의  천하위공>과 같은 맥락에 있는지 더 토론을 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오늘 흥사단에서 자란 정광태 (정무형)군과 연찬의 깊이가 보였고, 고재선군의 또 다른 고견을 여러 단우들이 듣고 공부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며, 두분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두분의 발표문을 존중하며 진지하고 사심없는 공심으로 돌아가 토론을 이어 간다면  이 두 의견이 합의점은 찾지 못한다 하드라도 도산선생의 대동을 제대로 이해하고 따르는 단우들이 늘어나서 적어도 서로 배척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광태 (무형)>
(1). 정광태군은 도산이 없는 마지막 상해 흥사단이 젊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대동은 공산주의로 받아들였으나, 그 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오류를 벗어나 오늘날의  북구와 카나다와 같은 사회민주주의로 수렴되었다고 보았으며, 오늘날에는 사민주의와 일치하는 대공주의도 오늘날 인구증가, 환경변화, 과학화로 새로운 진화를 강요받고 있다며 대공주의도 새로운시상/체제로 변화를 요한다고 주장하면서,
(2). 우리가 본 이광수나 주요한의 도산전기는 <도산의 대공주의>를 듣지 못한 오류라면서 도산의 마지막 비서로 자처하는 고 구익균이 도산의 대공주의를 계승발전시킨 점을 들어 대공이 도산의 유일한 독창적사상이라고 주장하고,(이창수군은 도산성생 따님의 증언"도산은 비서가 없었다"로 구익균비서론 이의 제기).
(3). 조소앙의 삼균주의(손문의 삼만주의/민족, 민권, 민생주의의 계승으로 보는 입장도 있음)가 도산의 대공주의를 계승했다(박만규이사장 장의 입장도 같다)고 주장한다.
(4). 대공주의는 제가 어제저녁에 말씀드린 대동과 더블어 단군이래 우리민족국가-국시인 <홍익인간>과도 맥을 같이한다고 하니 반갑지만 대공주의는 목표가 아니라 절차로 해석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대공주의는 "대힌민국과 한민족 통일과 발전에 발전의 방향타"가 아니라 "홍익인간 정신으로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통일과 발전을 위한 의사결정을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이루어야"한다는데 있으며 도산께서 대립하는"이론에도 일리가 있다" 말씀의 뜻으로도 보입니다.

<고재선 군>
이에 대하여 아리랑 고재선군의 반론은 저나 정광태군의 글을보고 제기한 반론으로 즉석에서 작성한 글이 아니고 오랜 동안 연구 정리한 내용으로 보이며 대단한 깊이도 엿 보입니다 . 특히 도산의 대공정신의 씨가
(1). 1894년 도산의 쾌재정연설에서 싹이 트고 1919년 4월10일 임시정부설되면서 이에 참여한 도산이 조회에서 "여러분 공과 사를 가르시요. 공과 사중 굳이 어느 한쪽을 희생하여야 된다면 사를 희생해야 됩니다"에서 그 원칙이 성립된 것으로 보았다.
(2)."정부의 직원이 아들이라도 아들이라  알지말고 사우(친구)라도 사우로 알지 마시오"라는 말은 대공과 공자의 대동(공자는 요,순을 조종으로 하여 3대에는 "내 아들만이 아들로 알지밀라"하며 후계자를 아들로 삼지 않았다)과 같은 뜻임을 저도 확인할 수 있었읍니다. 이에 대하여 1920년1월3일 신년하례식에서 행한 5시간의 연설이 공자의 대동과 손문의 천하위공과 같은 맥락의 도산의 대공주의 정신으로 본것은 고재선군의 주장이 탁견이라  하겠습니다.
(3). 1922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첫째는 과거 감정을 망각할 것. 둘째 일시동인 할것. 세째 일만표준하여 공명정직 할것. 네째 흉금을 피력할 것. 다섯째 공결에 열복할 것 등이외다?. 어떠한 이론을 진술하고 어떤 안을 제출하던지 그 자신이나 그 친구나 당파의 이해를 표준하여 외공내사하면 구하는 원만은이를 얻지 못할 뿐아니라 도리어 패망에 이를지니"라고 주장하였고 1926년 한국유일독립당을 결성하여 좌우익을 아울렀으나 2년 뒤,인 1928년 5월 <전국유일당조직촉성회>가 실패한 것을 보면서 같은해 12.20일 연희전문축구단 훈화 중, 대공주의라는 처음 썻다고 보았으며, <개인은 민족에 봉사함으로서 . .자신. .과 인류에 대한 의무를 다 한다>고 한것이 대공주의라고 보았다. 고재선군이 고 구익균이  3년간의 비서로 인정하나 도산은 비서가 없었다는 가족의 증언과 같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구익균의 주장대로 <도산은 사회주의 였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며, 공산주의자 김원봉까지 민족의 단합을 위해 포용하면서 마지막에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이민국으로부터 출국을 강요 당하는 수모까지 받았다. 도산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아닌 것은 물론 민족 좌우분열을 맊기 위하여 공산주의자까지 벌이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고재선군의 연구와 정견은 근래에 보기드문 탁견이고 대공주의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그리고 지금 미국 극좌파, 진보주의와도 연결하는 분열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정광채군의 견해는 저에게는 일리가 있다는 것을 도산의 <타에게도 일리가 있다는것을 애써 따르는 차원>에서 존중하지만 흥사단의 대공주의는 고재선군의 연구가 조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광채군이 고재선군의 발표에 대하여 논거를 제시하면서 흥사단단우들을 도산의 대공주의가 공산주의~사회주의~환경, 국경문제 등 극좌파적 진보주의까지 내다 보는 토른을 전개해서, 이방이 멸실상부한 흥사단의 공부방이 되길 바랍니다.
윤 미주 흥사단 태두께서 본인이 찰설한 이방을 탈방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긴 글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카고 지부 단우
림관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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